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합군 점령하 독일 (문단 편집) == 독일 == [[베를린 공방전]] 중 [[나치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함으로써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카를 되니츠]]를 위시한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성립되었다. 이 당시 독일군은 이미 궤멸된 상태였고,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서방 국가에는 항복하되 [[소련]]과의 전쟁(동부전선)은 지속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연합군은 [[테헤란 회담]]부터 [[얄타 회담]]에 이르는 여러 회담을 통해 전후 독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이미 논의를 끝낸 상태였다. 이에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반발하였으나, 당시 유럽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였던 [[아이젠하워]]는 이런 반발을 일축하고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다. 1945년 5월 8일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소련을 배제한 채 연합군에 항복한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지 않은 소련의 요구에 의해 5월 9일 [[베를린]]에서 한번 더 항복 서명을 한다. 비록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항복했지만 얼마간 유지될 수 있었다.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자신들이 독일의 정부로서 존속하기를 바랐으나 소련은 이런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바람을 깨고 5월 20일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에도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대한 소련의 비난은 계속되었다. 결국 5월 23일에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연합국에 의해 즉각 해체되고, 구성원들은 체포되었다. '''나치 독일은 이렇게 멸망했다.''' 전승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은 1945년 6월 5일 베를린에서 연합국 관리위원회(Control Council)[* 연합국 통제위원회 등으로도 번역된다. 관리위원회는 1945년 6월 5일 베를린 선언과 동시에 설치되었고 [[1945년]] [[7월 30일]]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화합하였다.관리위원회는 4개국 연합군사령관으로 구성되었다. [[1948년]] [[3월 20일]] 주독 소련군 사령관인 바실리 소콜롭스키가 관리위원회에서 이탈하고 그 해 여름 [[서독]] 지역에 [[마르크]]화가 도입되면서(통화개혁) 독일분단이 가시화되었다. 이로써 관리위원회는 운명을 다했다. - 이재승, 연합국의 독일점령과 사법정책에 관한 연구 2005, 297쪽 이하]를 설치한 뒤 얄타 회담에 의거, 독일 [[분할통치]] 및 4개국의 베를린 공동 관리에 관한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4개국의 분할 점령이 시작됨과 동시에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 지역이 폴란드와 소련에게 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